왕차오화 - 중국 공산당과 그 성공 스토리 (NLR 2015 1/2) 요약

NLR 91 - 2015 1/2월호 
http://newleftreview.org/…/wang-chaohua-the-party-and-its-s…


왕차오화 - 중국 공산당과 그 성공스토리


- 이 글은 2010년 페리 앤더슨의 글 “두 혁명”(소련과 중국의 경로를 비교하고 논평하는 글)에 대한 답변이자 비판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중국의 혁명 이후(특히 개혁개방 이후의) 현대사를 다루는 독립적인 글로 봐도 무방하며, 왕차오화의 전체적인 논지(특히 덩샤오핑과 80년대에 대한 설명)는 전리군 선생의 해당 시기의 논지(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와 매우 유사한 논조를 띄고 있다.


- 페리 앤더슨은 중국 혁명의 유산인 3가지 특징(①열정적인 농민 ②자신의 혁명에 관해 자신감과 전략을 가진 국가적 리더쉽 ③민족문화와 바깥 세계를 향한 확신에 찬 태도)이 개혁개방 시기에도 발현된 것으로 판단하며 이것이 80년대와 그 이후 중국의 부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왕차오화는 오히려 당이 개혁개방 시기 들어 그 세 가지 특징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억압하였다고 보며, (특히 89 천안문 사건은 그 명시적인 사례) 그것이 현재 세계 경제 속에서 중국의 부상의 특수한 경로를 형성해온 것으로 파악한다.


1. 혁명에 대한 해부

- 생략 (주로 소련과 중국의 대외관계 등을 비교 설명)


2. 개혁으로의 길


- 왕차오화는 중국 개혁의 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이 끼친 영향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 그녀가 볼 때 문화대혁명 기간 GDP는 성장한 것으로 나오지만, 마오의 전쟁 준비에 따른 3선 건설 등으로 일반 인민들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피폐한 것으로 판단(특히 농업과 경공업 부문의 실제 생산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을 강조)


- 마오 사후, 당은 마오와 4인방을 분리시켜 문혁의 종결을 시도했으며, 당의 우선순위를 계급투쟁에서 현대화로 조정 (처음엔 마오의 계승자였던 화국봉과 당의 8대원로들이 함께 작업) 이후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고 1981년 ‘역사결의’를 통해 문혁과 마오에 대한 평가를 하지만, 실제로 이는 국내의 현실정치의 산물이었지 실제로 마오와 마오 시기 당에 대한 비판적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음


- 실제 1976년부터의 과정을 보면 덩샤오핑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새로 잡은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이었음, 1976-78년 중앙 정치무대로의 복귀, 1978-79년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탄압, 1979년 베트남의 위협을 과장하여 애국적인 지지의 획득을 시도, 최종적으로 “團結一致向前看”이라는 구호로 집약(나중에 인민들은 向錢看으로 조롱)


3. 천안문 : 그 전과 후


- 덩샤오핑과 그 동료들(8대 원로)은 개혁 초기 순수한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민주적 정치개혁과 젊은이들의 참여 열망을 봉쇄했다. 그는 권력 복귀 이후 민주의 벽을 막았고 82년 헌법수정을 통해 대중들의 정치참여와 자기표현을 제한했다.


- 권력계승의 문제에서도 집단지도체제(법치 강조, 최고 지도부의 연령제한 등)를 강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로들의 권력 장악은 강고해졌다. 천안문 전후 후야오방과 자오즈양의 실각은 공식적인 회의체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향후 20년간의 권력계승(장쩌민, 후진타오)도 이미 당시에 정해졌다.


- 경제 개혁은 ‘자유화’의 담론으로 진행되었는데, 한편으로 농촌과 도시에서 생산은 증가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비록 낮은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사회적 복지는 해체되었다. 정치 개혁의 담론은 경제적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격하되었으며, 이는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이라는 구호로 집약되었다.


- 25년이나 지났지만 천안문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은 여전히 완전히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왕차오화는 천안문의 핵심적인 중요성은 덩샤오핑이 당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도전, 특히 사회주의적 원칙의 범주를 벗어나서도 개혁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천안문에 대한 진압은 중국이 지구적 경제 체계에 통합될 수 있는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 민중들의 봉기는 문혁 형식의 ‘동란’으로 여겨져, ‘안정’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되지 못했고, 사회주의적 민주와 참여정치의 슬로건은 가라앉았다. 정치적 시위를 진압하는 것은 경제성장을 가져다주기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항상 새로운 경제정책이 도입될 때마다 그 이익이 무엇이던 간에 그 비용은 얼굴없는 수많은 대중들과 목소리낼 수 없는 생태환경이 감당해야 했다. (주택, 교육, 의료보장, 노동법, 주식시장 등등)


4. 경제 기적


- 페리 앤더슨은 덩샤오핑의 1992 남순강화를 중국이 기존의 사회주의적 지향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흐름으로 전환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지만, 덩샤오핑은 이미 1987년 이래로 ‘경제발전’을 당의 가장 중심적인 사업으로 강조해왔으며, ‘사회주의’는 이제 단순히 당이 모든 부분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지하는 슬로건에 불과해졌다. 덩샤오핑이 “안정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슬로건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천안문 이후이다.


- 앤더슨은 자신의 글에서 지난 30년간 중국의 경제 개혁이 성공적인 스토리를 써왔다고 평가하지만, 거기서 그가 얼버무리고 있는 것은 1989년 이후이 어려운 시기이다. 장쩌민과 주룽지는 1989년 이후 도시와 산업개혁을 진행하기 위해 계속해서 공식적인 미디어를 통해 ‘철밥통’을 생산성의 장애물로 묘사해왔고, 실제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1990년대 2,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리해고당함) 중국 노동자들은 개혁의 희생양이 되었다. 국유기업 역시 많은 관리자들이 사유화했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충격요법’과 별 차이가 없다) 2000년대 들어서 공적 자산의 금융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부패가 발생했다.


- 농촌과 농민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90년대 들어 정부의 세제 개혁(분세제)으로 인해 중앙 중심으로 재정이 돌아가고, 지방의 행정과 농업이 상품화와 시장 논리에 의해 돌아가게 되면서 기존의 개혁을 통한 이득은 사라지게 되었고 많은 향진기업들 역시 집체의 성격에서 실질적으로 개인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런 상황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농민공’(2013년 2억 7천만명)이 되었고, 이들은 주거, 교육등 어떠한 사회보장 정책도 누리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는 힘을 합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는데, 수억의 농민이 이런 규모와 속도로 극빈프롤레타리아가 된 경우는 세계사에서 처음이다.


- 종합적으로 왕차오화는 중국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페리 앤더슨 역시 이러한 점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왕차오화는 좀 더 철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꼬집는 듯...)


by 허난시 | 2015/03/03 22:06 | 중국연구실 | 트랙백 | 덧글(3)

트랙백 주소 : http://nanxi95.egloos.com/tb/302341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허난시 at 2015/03/03 22:09
왕차오화의 1989 천안문 관련 글 모음
http://www.64memo.com/b5/14646.htm
Commented by 허난시 at 2015/04/09 12:50
London Review of Books
Vol. 29 No. 13 · 5 July 2007 pages 38-39
Diary - Wang Chaohua
왕차오화가 2007년에 LRB에 썼던 1989 천안문에 대한 평가와 회고
아주 러프한 요약 번역...

- 정부의 공포감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6주 동안 처음에는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것이 국가적인 정치적 위기가 되었다. 즉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중국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대한 정당성이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덩샤오핑의 시위 진압 결정으로 당은 권력의 독점을 회복했으나 그 정당성이나 권위를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1992년의 남순강화 “발전은 확고한 도리”) 그 이후로 중국에 여러 가지 경제적 발전(생활수준의 향상, 치솟는 외환보유고, 도시화의 확장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은 여전히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 두려워하는가? 왜 과거를 왜곡하고 인민의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애쓰는가? 왜 1989년의 시위를 동란으로 묘사하는가? 이 질문은 바로 “왜 당시의 시위참여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탱크 앞에 섰는가?”라는 진짜 질문으로 이어진다.

- 1989 천안문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견해

1. 사회경제적 견해 : 1988년 초에 정부는 자유가격제도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일부 서구의 연구자들은 이것이 1989년 봄의 대중의 사회적 저항의 요소라고 주장한다. 중국 신좌파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군사적 진압이 경제 시장화의 길을 닦았다고 여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대중 운동을 이끌었던 힘은 바로 기존의 집단적 복지를 앗아가는 개혁에 대한 저항이었다. 베이징에 울려퍼졌던 총성은 사회주의의 ‘철밥통’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분쇄한 것이며, 중국을 완전한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2. 정치적 견해 : 이 견해에 따르면, 대중 운동은 사회주의적 과거에 매달린 것과는 거리가 멀고 자유주의적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것은 자유의 여신상을 본따서 만든 ‘민주의 여신상’이었고, 미국이야 말로 시위참여자들의 진짜 꿈이었으며, 철밥통이 아니라 시장(market)과 투표함(자유선거)이 그들이 바라던 것이었다.

- 왕차오화의 견해 : 1988년 여름 이후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1989년 학생 시위가 폭넓게 지지받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이 1989년의 정치적 시위로 전환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1989년의 경제적 슬로건이 잘못된 과거의 정책, 특히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경제적 요구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었다. 실제 주요한 요구는 언론의 자유, 공민의 권리, 시민 참여 등의 정치적 요구였다. 이 사회운동은 급격히 분출되면서 급작스럽게 공간이 열렸다. 이 기간동안 인민일보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전례없이 보도의 자유를 누렸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 운동의 이데올로기도 혼종적이어서 미국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적대적인 견해부터 미국을 이상으로 삼는 견해가 다 존재했었다. 실제로 민주의 여신상 아래에서 사람들은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1989 천안문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은 어떤 패러다임의 입장이나 이런저런 지도부의 언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이 창조적인 상상과 그를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공공의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공민의 권리와 그를 가능케 하는 경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운동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는 정치적 운동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위참여자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위참여자들이 자기절제적이었던 것은 정부의 진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능력을 가졌다는 데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이는 확실히 중국 혁명과 사회주의적 과거로부터의 유산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6월 3일-4일 학살의 밤에 주요 희생자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었다. 서로 낯선 이들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도왔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다 목숨을 잃었다. 베이징은 그날 밤 용기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6월 4일을 매년 기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근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그 운동의 장엄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http://www.lrb.co.uk/v29/n13/chaohua-wang/diary
Commented by 허난시 at 2015/11/08 18:04
London Review of Books
Vol. 37 No. 21 · 5 November 2015
pages 13-18
‘I’m a petitioner – open fire!’
Chaohua Wang on justice in China

"(전략) 당국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중의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연대'다; 당국은 전자는 통제하려 하고 후자는 억압하려한다. 25년전 천안문 광장에 시위자들이 모였을때, 그들의 슬로건은 1949년 이전 중국 공산당의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인터네셔널가'와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이 광장에서 울려퍼졌다. 시위자들은 경찰과 군인들에게 '인민의 편'에 서라고 요청했지만, 당국은 그들을 '반혁명' 분자로 맹렬히 비난했다. 이 사이의 불일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천안문 이후, 거대한 경제적 개방과 강력한 정치적 통제가 같이 진행되었다. 1990년대 말에 정치적 모임을 만들거나 그에 가입한 많은 활동가들이 긴 기간 동안 투옥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파룬궁은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발언을 강력히 통제했다. 그 결과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내부화된 자기검열이었다.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수를 써서든 피해야할 것이 되었다. 10여 년간 중국 예술가들(화가, 작가, 영화감독, 조각가 등)은 그들의 작품이 정치적 의미로 가득차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치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해왔다.(후략)"

http://www.lrb.co.uk/v37/n21/chaohua-wang/im-a-petitioner-open-fire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