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샤오밍 강연 동영상 중 1989 천안문 운동 관련 부분 번역


왕샤오밍(王曉明) 선생의 강연 동영상 중 89 천안문 관련 부분을 살펴보고 번역했다.

전체 강연 동영상 링크 주소 http://www.tudou.com/home/_725668476/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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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운동은 아주 복잡하여 많은 모순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6.4 운동을 이해하는가는 80년대의 복잡한 현실을 파악하는 열쇠입니다. 어떻게 얘기하건 간에 6.4 운동은 80년대 전체를 아우르는 개혁의 내재적 모순이 격화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과 공산당 정권의 연이은 몰락도 역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6.4 운동은 두 가지 큰 결과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동유럽 모델과 미국 모델로부터 나온 민주적 요구가 억압됐다는 것입니다. 

대중과 지식인들은 보편적으로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공공생활에 대한 냉담한 감정이 형성되어 개인의 물질적 생활의 개선에만 관심을 두게 되었고, 동시에 민중들은 정부의 정책결정을 개선하려는 요구들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지점은 바로 민중과 인민들이 보편적으로 정부에게 이것저것을 하라고 아주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6.4 이후에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러한 요구들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그리고 아주 극심한 정부의 정책이 6.4 이후부터 하나씩 추진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결과입니다.


두 번째 결과는 통치계급의 심각한 반성입니다. 

심각한 반성의 결과는 바로 현실주의, 그리고 현실의 공리주의의 측면으로 돌아가 민주와 사회주의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실제 포기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바쵸프의 개혁도 부정되었고 서방식의 민주도 부정되었습니다. 당내 개혁파도 철저히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당내 개혁파들이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민주로 사회주의를 구해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4 운동과 소련 및 동유럽 공산당 정권의 붕괴를 통해 통치계층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하나는 개혁이 사회주의를 구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고 민주는 사회주의를 구해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를, 그리고 사회주의 정권을 당으로 이해한다면 민주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권좌를 해체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통치계급의 반성은 현실주의로 돌아가는 것으로, 즉 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현실주의의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새로운 개혁의 명확한 목표가 형성되었는데 바로 정치안정과 정권안정의 전제 하에 경제를 발전시키고 세계와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90년대의 개혁입니다. 이 시기에 개혁의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레닌 모델은 최종적으로 리콴유 모델이 되었습니다. 리콴유 모델을 포기한 후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80년대는 여러 가능성들이 모두 존재했습니다. 6.4 운동을 거치고,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를 거치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거친 후에 내부에서 새로운 컨센서스가 형성되었습니다. 개혁의 방향의 기본은 리콴유 모델로 '경제발전, 하지만 정권안정'입니다. 소위 이 정치안정, 그리고 안정유지는 저우용캉 개인의 발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하나의 컨센서스이고 하나의 원칙입니다. 이렇게 1980년대의 개혁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1980년대의 개혁과는 확연히 다른 개혁의 길이 관료 계층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80년대 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관료 계층은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에 새롭게 개혁이 제기되자 이것은 새로운 개혁이었기 때문에 관료계층은 보편적으로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모두가 80년대와 90년대의 개혁을 흐리멍텅하게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방법은 사실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이 둘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개혁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한 것입니다. 저는 이 다름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by 허난시 | 2015/07/07 11:18 | 중국연구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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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허난시 at 2015/07/07 11:20
왕샤오밍(王曉明) 선생의 89 관련 내용들을 살펴보다가 깨달은 사실...왕샤오밍 선생이 파악하고 있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은 첸리췬(錢理群) 선생님의 역사 인식과 아주 유사하다. 첸리췬 선생의 57체제에서 6.4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인식(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한울출판사)과 흡사하게 왕샤오밍 선생도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 사회주의의 변질(일당 독재 체제의 강화, 당의 통제를 벗어난 대중운동에 대한 진압 등)이 나타났고 1989를 기점으로 이 권력과 자본이 결합하는 형태의 체제가 등장했다고 인식한다.(악성 사회주의와 악성 자본주의의 결합, 공산당 권력과 시장의 자본이 결탁하여 형성된 통치체제) 이러한 선생들의 해석은 계속해서 (좌우 구분없이) 1978년을 어떤 하나의 전환점이자 기점으로만 삼는 기존의 중국연구의 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아래는 왕샤오밍 선생의 글에서 관련 부분들을 가져온 것....

[가까이 살피고 멀리 바라보기 - 왕샤오밍 문화연구] (문화과학사, 2014) 224p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사업은 점차 변질되었고, 사회 내부 모순은 더욱더 심화되어서, 1966년에 이르러서는 ‘문화대혁명’이 폭발했다. 또한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인해 추동된 1980년대 ‘개혁’은 결국 1989년의 ‘6.4 풍파’를 야기했다. 이때에 이르러 ‘중국혁명’의 사상과 사회운동의 에너지가 거의 다 소진되었고 사회는 전면적으로 우경화되었다. 중국은 현대사상 처음으로 우익세력이 주재하는 ‘반혁명’ 또는 ‘포스트혁명’의 단계에 들어섰다.

"'대시대‘가 임박한 중국 - 문화 연구 선언“ [고뇌하는 중국] (길, 2006) 388p - 390p
다른 한편 1989년 봄의 항의 시위가 천안문 광장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어갈 무렵, 폴란드에서 시작된 공산당 정권의 붕괴는 동유럽의 다른 나라로, 마지막에는 소련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마오쩌둥이 1950년대 중반기에 이미 체득한 것, 즉 만약 ‘사회주의’국가의 집권당이 정치개혁을 추진한다면 정권이 붕괴될 것이고, 그 정권에 의존하고 있는 개인의 이익도 반드시 상실될 것이라는 암울한 계시를 실증하는 듯하다. 나는 중국의 집권당과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 내부에서 이 계시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역량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고 생각한다.(1956년 헝가리 사건에 영향을 받아 1950년대 중반기 마오쩌둥과 그 밖의 지도자들은 헝가리와 비슷한 민주 개혁에 강한 경각심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일체의 대중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줄곧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정책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1980년대 말 국내외 정세가 가파르게 전개되자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진압을 결정했다)
1989년 6월 3일 심야에 베이징에서는 총성이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탱크가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 천막을 향해 돌진해갔다. 집권당과 정부 각급의 관료들 사이에 마오쩌둥의 계시가 신속하게 확산되었기 때문에 ‘당내 개혁파’가 개혁으로써 사회주의 정치를 구제하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전체 통치계층은 이익의 원칙 아래 다시 단결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이 다시 ‘시장경제 개혁’을 들고 나왔을 때 전체 통치계층은 곧바로 이에 대해 열렬히 화답했다. 비록 ‘개혁’, ‘현대화’ 심지어 ‘시장경제’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1990년대 ‘개혁’은 본질적으로 1980년대 ‘농가하청경영책임제’에서 시작된 경제 개혁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사상해방운동’에서 시작된 정치, 문화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혁의 지향점은 명확했다. 개혁의 사회적 조건은 더욱 달랐다. 1990년대 ‘개혁’은 마치 이윤을 유일한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데 한정된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개혁이 요구한 것은 오직 효율, 재부, 경제적 경쟁력 뿐이었으며, 사회의 물질적 생활 개선 요구만 허용했지 정치 민주, 환경 보호, 윤리 확립, 문화 보호 등과 같은 그밖의 요구는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의 장애요소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는 1989년의 총성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회적 세력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1989년 후반기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정신, 문화, 정치적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정과 기대도 눈에 띄게 분산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현수막을 접고 마작 탁자를 펴면서 시선을 개인의 의식주라는 문제로 돌릴 때, 눈앞의 물질적 생활에 대한 관심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아주 빠르게 확산되어 나갈 때, 돈냄새를 동반한 새로운 ‘개혁’은 자연스럽게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개혁이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고 자기 손에 장악된 권력이 거대한 자본이 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 관료들도 1980년대 중반기의 몹시 의심하던 태도를 던져버리고 ‘시장경제’의 큰 바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 경제 개혁’이 어느 방향으로 길을 내고 돌진할 지는 분명했다. 해가 중천에서 떠오르듯이 ‘신흥부자’의 신속한 등장은 더욱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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